살아보자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영화 포스터
"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어린 날의 내 기억속에 언제나 새겨져있던 말. 등하굣길에 포스터를 본 이래 스무살에 죽고자 생각하고 암울한 현실을 버티며 살아왔다. 지금에야 결과를 보고선 나를 강한 사람이라 하지만, 바람앞의 등불처럼 세상 누구보다 나약했다.

입학때부터 매학기 초등학교 성적표엔 줄곧 눈물이 많은 아이라는 선생님의 평이 따라왔다. 너무 슬픈 일이 많았다. 엄마 아빠는 하루가 멀다하고 싸우고, 장난끼 많던 나는 끊임없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부모님께 매일 혼났다. 갖고 싶던 장난감도 갖지 못하고, 보고 싶은 만화영화도 못보고, 그렇게 억울한데 학교에 와서 선생님께 혼나기까지 하면 눈물이 터지기 일쑤. 발가벗겨져 밖에서 벌서다 학교 친구들이랑 마주치거나, 다투고 난 뒤 몇날 며칠을 집에 안들어오시는 엄마가 그리워질때는 어린 나이에도 삶에 대한 의지가 꺾이기 다반사였다.

아버지 관점에선 아들이 사고뭉치라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각목인 “교육봉”에 온몸에 멍이 들도록 맞거나, 정말 화가 나시면 당시 여느 이웃집에서 그렇듯 나에게 손찌검을 하시기도 했다.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던 존재였기때문에 아버지께 맞을때마다 너무도 서러웠다.

밖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맞고 다녔다. 특히 부산에 이사가선 서울말투를 쓴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건 길거리에서건 서울말투 재수 없다고 시비 걸었지만 부산사투리는 단기간에 익힐 수 없었다. 맨손으로 맞으면 좀 나았다. 여럿에게 둘러싸여 맞거나, 몽둥이, 쇠파이프, 칼로 맞으면 이대로 죽겠구나 싶었다. 이렇게 맞다가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학생이 있어 옥상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나도 그 친구를 따라갈까란 생각을 여러번 하다가, 곧 맞아서 죽을테니 어차피 그게 그거겠구나 하고 버티다 보니 졸업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진학한 학교는 버스 종점에서 종점 구간이라 중학교 때 마주친 이들을 다시 볼 일이 드물었다. 그리고 말 수를 줄이고 부산 사투리도 어느 정도 익혀서 원초적인 위협에선 벗어나게 되었다.

고3의 나는 아무 희망도 꿈도 없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도 변변치 않은 학교 성적과 여러 이유로 엉망인 출결 때문(기업들은 성실성 부족으로 평가)에 취업은 가망없었고, 그래서 수능을 보겠다고 공언했지만 참고서 한권 없이 교과서도 들춰보지 않고 하염없이 오락실만 다녔다. 함께 오락실 다니는 친구들이 있긴 했지만, 맘을 터놓고 진지한 이야기를 할 친구는 하나도 없었다. 중학생이 된 이래 떠돌던 나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다는 건 견디기 힘든 일이었고, 거의 하루도 빼놓지 않고 우울하고 잠들기 전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집안은 풍비박산 난 지 오래. 자주 가출하시던 어머니는 중학교 1학년이 되던해 이후로는 소식 조차 들을 수 없었고, 동생도 집을 나간 지 몇년째. 가끔 눈에 띄지 않게 집에 들러 돈 될 만한 것들은 훔쳐가곤 해서 그 존재를 인식하는 정도. 아버지도 동생이 친 사고 수습하고 찾아다니느라 일을 제대로 하실 수 없었고, 가압류 딱지들이 가득한 집에는 독촉을 피하시려던 것인지 잘 들어오시지 않았다. 학교에 가지 않은 날들은 대부분 차비가 없어서 였지만 걸어서 간 적도 있는데 편도로 5시간 거리여서 몇 번 해보곤 그냥 가지 않는 쪽을 택했다. 며칠째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초라한 내 자신이 너무 불쌍해서 스무살 까지는 너무 길다고 생각한 어느날이었다. 차들이 쌩쌩 달리는 길가로 뛰어들어보았지만, 급정거하고 경적을 울릴 뿐 아무일도 일어나지 않았고, 전철 플랫폼에선 몇 번 타이밍을 놓치다 역무원에게 혼만 나고 돌아가면서 죽는 것도 쉽지 않으니 그냥 스무살 까지만 버텨보자 다짐했다.

계절이 지나고, 정말 스무살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어차피 대학은 가지 못할테고, 이쯤에서 세상과 작별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 고민하던 때에, 노력한 것에 비해서는 수능 점수가 잘 나왔고 실업계 특별전형이란 것이 있어서 꿈에도 생각못했던 합격통지서들을 받게 되었다. 도저히 대학에 갈 형편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지만, 어차피 곧 죽을 것 빚을 내던 저질러보고, 대학이란 어떤 지 한 번 보고 가보자라고 다짐하며 간신히 등록금을 맞추어 입학은 했다.

적응을 할 수 없었다. 실업계 고등학교에서도 공부라곤 한 번도 제대로 해본 적 없는 내가 따라 갈 수 있는 수업은 없었고, 돈들어가는 과/학부 모임은 거의 참석하지 않았기에 한동안 대화를 나누어 본 사람도 없었다. 괜한 선택이었나. 역시나 계획한대로 스무살이 되면 끝을 냈어야 했나. 암울한 날들이 계속되가던 중, 몇 안되는 우리과 여학생이 나에게 말을 걸어주었다. 여자사람과 이야기 해 본 건 초등학교 이래 처음. 알고보니 나에 대한 잘못된 소문이 있었다고 한다. 성숙한 외모탓에 3년 재수한 걸로 오해해 친구들이 쉽사리 말을 걸 지 못했던 것. 오해를 풀고 친구들과 급속도로 친해졌다. 술이란 것도 처음 접해보고 친해질 수록 맘에 있는 이야기를 털어내며 전에 없던 의지가 생겨났다. 대학 공부에선 아무 기대도 없었지만 친구들 보는 낙에 매일이 즐거웠다.

그렇게 스무살을 넘겼지만, 여전히 내 앞의 어둠의 터널에선 어떠한 불빛도 볼 수 없었다. 의지하던 친구들은 군대에 가거나, 휴학을 하였고. 여학생들은 복학생들과 주로 어울려서 순식간에 내 주위에 아무도 없는 사태가 오고 말았다. 어영부영 선동렬 방어율로 학기를 마감하고 간신히 내오던 등록금도 다음학기엔 더 이상 마련할 방법이 보이지 않아 며칠째 혼자 집에서 하염없이 천장만 바라보며 삶의 끈을 놓기 직전,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첫 직장에서 손길을 내밀었다. 신의 존재를 믿을 수 밖에 없던 일. 이후의 이야기는 다른 글에서 다루고 있으므로 이 정도로.

직장 생활을 잘 하리라는 생각은 전혀 해보지 않았다. 안되면 그때 모든 것을 포기하자라는 심정으로 하루 이틀 버텼다. 딱히 그것을 위해 큰 노력을 한 것은 아니었다. 생사의 경계에서 안 되면 말자 버티다 보니 오늘까지 오게 되었다. 미국에 오게 될 때도 마찬가지. 미지로 가득한 미국 생활. 해보고 안되면 돌아가자라고 진지하지 않은 자세로 시작. 정리해고 되었을때도 다음직장 구하지 못하면 귀국하자라는 마음 가짐. 바로 전 직장에서 무작정 박차고 나왔을 즈음엔 그냥 잘되리란 생각이 들더라.

결혼 직전 주식투자등으로 전재산을 날리고, 전국을 뒤흔든 불미스러운 사건에 연루되었을때는 지금의 배우자인 당시 여자친구가 큰 힘이 되었기에 극단적인 생각까지는 하지 않았지만, 동반자로서 내 인생의 막막함이 와이프에게 전가될까 걱정도 많았다. 하나 하나 마주하며 시간이 흐르다보니 길지 않은 시간내에 모두 잘 해결되었다.

스물까지로 계획했던 삶의 딱 두배인 마흔살, 지금의 나는, 자신의 기준에서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해도 될 정도로 부족함이 없고, 매일 웃음이 끊이지 않을 정도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어린날의 나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미래에 있는 것이다. 비결이라면 살아있는 상태에 놓여 있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그것말고는 부끄러울 정도로 아무런 노력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죽음의 경계밖에서 걱정했던 일들은 일생에서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고 해왔던 일들은 잘 풀렸다. 그에 대한 또다른 비결이 있다면, 단 한번도 내 미래가 어떻게 될 것이라 그려본 적이 없다. “안되면 말자” 라고 선을 그었지만, “안되면”이라는 조건은 단 한가지인 방면, 반대의 경우는 다양한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어떤 방향으로 가던 그것은 의미 있는 삶으로 흐르게되더라는 것을 길지 않은 내 인생에서 느끼고 있다. 당신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놓여있다면, 일단 살아보자. 삶이 주는 결과는 거대한 노력이 없더라도 생각보다 달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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