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그래머가 되기까지...

취직

2000년 3월.
나는 이제 막 3학년이 된 대학생이다. 실업계 고등학교를 중간 정도 성적으로 출석일수가 모자라 간신히  졸업한 것 치곤, 비록 명문은 아니지만 4년제 대학교에 진학한 것을 다행이라 여기며 재학중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이 좋지 않다. 직전 학기에는 한과목을 제외하곤 모두 F 학점을 받아 학사경고를 받았고, 수강신청은 했지만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서 수일 내로 등록을 하지 못하면, 이번 학기는 휴학을 해야 할 판이다. 하지만, 그간 학비로 사용하기 위해 이미 대학생 신분으로 대출 할 수 있는 한도까지 모두 끌어쓴 상황이다. 군대를 갈까도 생각 중이지만, 가출한 동생과 사업 부도로 고생하시는 아버지를 생각하면 그 것도 내키지 않는다. 아버지는 며칠째 집에 안들어오시고, 차비가 없어 집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다. 배가 많이 고프지만 먹을 것이 없어, 이 곳, 50년도 더 된 남부민동 달동네 슬레이트 지붕 밑에서 몇 시간째 누워 있는 건지도 모를 만큼 멍하니 천장만 바라보고 있다. 낮이 지나고 잠 못드는 밤이 지나 다시 아침... 핸드폰이 울린다. 핸드폰 요금이 연체된 지 꽤 됐는데 아직은 안끊겼나 보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중앙정보기술의 김성수 이사라고 합니다."

중앙정보기술? 국가기관인가? 나한테 왜 전화한 걸까...

"이번에 우리 회사에서 자바로 채팅 서비스를 만드는데, 아르바이트 해 볼 생각 없으신가 해서 전화드렸어요."

회사였군. 그런데, 난 넷츠고에서 채팅을 해본적은 있어도 그걸 어떻게 만드는지는 전혀 아는바가 없었으며 프로그래밍이라곤 학교에서 C언어를 해본게 전부였다. C언어의 학점은 C0를 받았고 아마 내가 최하점이었을거다. 자바라면 HTML에 들어가는 자바(당시엔 자바스크립트와 자바가 다른 것인지 몰랐다.)를 복사해서 붙여넣기 해본 적이 있는 경험이 다였다.

"저... 죄송한데, 저 그런거 할 줄 모릅니다."
"제가 강태훈씨 홈페이지를 봤는데 충분히 하실 수 있습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죠. 300만원 정도 드릴테니 한 번 해봅시다. 섭섭지 않은 금액일겁니다."

그렇다. 300만원은 큰 돈이고, 난 무척이나 돈이 필요하고 무조건해야 할 것 같다. 홈페이지라면 1학년 2학기에 수업을 들으며 과제로 만들어 둔 개인신상에 관한 홈페이지 (야후에 사이트 등록)인데.. 거기에 적어둔 전화번호를 보고 연락한 것이었구나.

"네. 그럼 해보겠습니다."
"그럼, 내일 오전 10시에 엄궁에 있는 부산벤처빌딩 207호에서 보겠습니다."

통화는 3분도 안걸렸고, 난 돈 벌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피곤해서 잠이 들었다. 저녁 늦게 깨서 긴장한 탓에 또 밤을 샜고, 옆집에 사는 동생에게 차비를 빌려 집을 나섰다. 외진 곳에 있어 찾긴 힘들었지만 제 시간보다 30분 정도는 일찍 도착해 입구를 서성였는데, 안경을 끼고 노인과 같은 인상의 경비쯤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나에게 말을 건냈다. 자신은 이 곳에 면접을 보러 온 사람인데 혹시 나도 그러하냐고 물었다. 이 아저씨는 나보다 다섯 살이 많은 이봉호씨. 일종의 면접은 한달정도 작업할 채팅사이트에 대한 개요만 듣고 별다른 질문 없이 통과하였고, 우린 다음주부터 출근하기로 하였다. 봉호씨는 정규직으로, 나는 아르바이트로...

2000년 3월 27일. 첫 출근 날이다. 회사의 사정으로 채팅 건은 물건너 가게 되어, 이왕 이렇게 된 것 입사하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을 받았다. 월급 50만원의 계약서를 보고 당황했다. 금액이 적어서가 아니라 등록금을 해결해 줄 수 있는 300만원의 금액은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장님께 상황을 설명 드렸더니, 파격적인 제안이 들어왔다. 이번 학기 등록금을 내줄테니 당장 계약서에 사인하라는... 얼떨결이었지만, 너무나 기뻤고 그간의 괴로움은 한번에 아주 작은 기억으로 사라져버렸다.
고용계약서를 작성하고, 곧바로 학교로 향했다. 직장생활을 하려면 휴학을 해야 되기 때문이다. 담당 교수님이신 손영선 교수님께 취직이 되었으니 휴학을 부탁한다고 말씀드리니, 너같은 꼴통이 무슨 취직이냐. 지금 사기당하는 것 아니냐. 라는 반응이었지만, 휴학계를 제출하고 왔다.
이렇게 해서 인원 10여명정도의 작은 회사인 중앙정보기술에서 나의 직장 생활은 시작되었다.

서울로...

입사는 했지만 아무것도 할 줄 아는 것이 없었다. 어디서 시작해야 할 지 감 조차 잡을 수 없었다.나보다 3개월정도 먼저 입사한 정원희(현. 유엔젤 과장), 김두성씨가 나에게 객체지향과 소프트웨어 공학 그리고 자바에 대해서 알려주려고 한달 정도 시도했지만, 기초가 전혀 없던 나에게는 무리였기에 결국 포기하고 나는 HTML 만 맡기로 하였다.
입사 한 지 1개월쯤 지나, 나와 원희씨, 두성씨, 디자이너인 전성현(훗날 NHN 동료)씨, 최대리, 전병관대리, 박연석 과장은 한달 계획으로 서울사무실로 출장을 가게 된다.
공군 KTX 전자교범 시안을 제작하기 위해서 간 것으로 기억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굳이 서울로 갈 필요는 없었지 싶다. 아마도 회사 입장에서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서울에 사무실을 두는 것이 유리해서 였을 것이다.
중앙정보기술 서울 사무실의 위치는 삼성동 테헤란로에 있는 대종빌딩 (포스코센터 맞은편)이었다. 앞에는 마이크로소프트와 드림위즈, 뒤로는 오라클, 컴팩 이 있는 닷컴붐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그 전까지 그저 등록금에 만족하고, 50만원 소득의 감동에 젖어 있었던 나는 이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 테헤란로에서 살아남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된다. 비록 퇴근 후에는 8명이 10평남짓의 지하 원룸에서 합숙하고 있는 동남아 노동자 수준의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브레인 업그레이드
KTX 전자교범 시안은 결국 제안이 탈락해서 진행할 수 없게 되었고,  Brain Upgrade라고 이름 붙여진 새로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 위해 출장을 연기하였고, 이후로 퇴사일까지 서울에 머물게 되었다. 이 프로젝트는 당시 유행처럼 번지던 KMS (Knowledge Management Service) 를 ASP (Application Service Provider)로 제공하는 것이 목적이었는데, 우리는 특이하게 Web OS 형태의 UI로 서비스하려고 계획했다. 나는 여기서 바로 이 Web OS UI 를 구현하는 것을 맡았다. 지금에서 고백하는 데 이 UI는 webos.com 의 것을 거의 그대로 베낀 것이었다. JScript 와 HTC, CSS의 조합이었는데 현재의 Ajax 웹서비스와 비슷한 컨셉이었다. 이때의 경험이 현재까지도 나를 Java Script 전문가 (Lycos, USA 의 Leo. Shin 님께서 인정)로 유지시켜 주고 있다. 당시에는 내가 하고 있는 일이 얼마나 고난이도의 것인지를 알지 못하고, 그저 다른 사람들이 JSP로 서버사이드의 구현을 하는 것을 동경했었다.
아직 시장에 출시되진 않았지만 그 해 8월, 바른손 그룹에서 이 프로젝트의 가능성을 높이 사서 우리 회사는 대단한 규모의 펀딩을 받게 된다.
이후, 사명을 센트럴에스티(Central System Technology, 결국 중앙정보기술의 영문 버전 정도)로 개명하고 사무실은 좀 더 큰 곳인 바로 옆의 본솔빌딩 (이곳은 포스코 센터와 더 정면으로 맞은편)으로 옮기게 되었고 직원 수는 이후 200여명 까지 늘어나게 되었으며, 나는 연봉이 4배 정도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리고 이 시기에 지금의 와이프를 만났다.
이두만
센트럴에스티의 이두만 사장(오른쪽)
그렇지만, 경영진의 판단으로 브레인업그레이드는 시장에 출시하지 않고 사업을 다각화하다가 2001년 말쯤엔 투자금을 모두 날려버리고, 나는 약 3개월 동안 월급을 받지 못하다가 결국 회사를 떠나게 되었다.

어헤드모바일

내 월급 중 내 생활비를 제한 대부분은 대출금을 갚고, 가족의 생활비로 쓰였기에 저축해 둔 돈이 전혀 없어서 임금 체불은 치명적이었다. 차비가 없어서 능동 자취집에서 역삼동 회사까지 걸어가기도 하였으며, 점심값이 없어 매일 삼각김밥과 컵라면만 원희씨에게 얻어먹고 있었다.  아버지가 부산에서 사고를 당해 큰 수술을 할 때도 찾아갈 수 없었을 정도.

결국 버틸 수 없어 이직을 결심하였다. 출근하여 신문을 펼쳤는데, 조선일보인터넷 대상 수상작들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모바일 인터넷 부문 대상을 수상한것이 "어헤드모바일"의 "친구찾기"서비스였다. 당시 모바일 인터넷이라는 것이 웹 이후의 트렌드로 부상하고 있었기에 이것이구나 싶었다. 닷컴버블이 한창일 시기였기 때문에 더 좋은 대우로 갈 수 있는 곳이 있었으나 (프리챌에서도 러브콜이 있었다.), 나는 도전을 택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동안 바로 앞에 있으면서 동경해온 포스코 센터에서 일하고 싶은 마음도 컸다.)
LBS(Location Based Service, 위치기반 서비스) 중심의 회사였기 때문에 나는 그것을 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으나, 기대와는 달리 첫 프로젝트로 LG텔레콤의 VOC (Voices of Customer)를 맡게 된다. 당시 어헤드모바일의 대표였던 이양동 사장은 LG인터넷의 CEO이기도 했기 때문에 LG텔레콤과 특수관계에 있어 이러한 프로젝트를 얻게 되었다. ASP 와 MS-SQL 기반의 웹 사이트를 개발하는 것이었는데, taeyo 사이트의 도움으로 간신히 모양은 갖출 수 있었다.

 이후에도 LBS가 아닌 VOC와 비슷한 성격인 LG 텔레콤의 CSR이라는 프로젝트를 맡았다. 이번에는 LG텔레콤 사무실에 상주하며 개발하며, 좀 더 강도 높은 기술 수준이 요구되었는데, 기존의 아주 느린 오라클 기반 서비스를 개선해야 하는 것이었다. 사실 DB 모델링을 정식으로 해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센트럴에스티에서 다른 동료들이 ER-Win을 사용하는 것을 곁눈질 한 적이 있어, 그 때의 프랙티스를 적용해보았다. 그저 그런 수준의 정규화만 했는데도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4~5초 걸리던 조회는 0.0x 초 대에 해결이 되었고, 이 일을 계기로 나는 어헤드모바일에서 두터운 신뢰를 얻게 되었다. 그 신뢰가 어느 정도 였냐면 내가 추천한 지인들이 있는데, 강혜진(고등학교 선배. 대학교 동기. 현. LG데이콤 대리)씨는 무면접으로 통과, 센트럴에스티에서 좀 더 고생하시던 정원희씨 또한 별다른 절차 없이 입사할 정도 였으며, CSR 프로젝트가 완료된 시점에서 사장님이 전직원을 모아두고, 앞으로 몇달치 월급은 강태훈씨가 벌어준 것이라며 축하해주기도 하였다.
원희씨는 이 때도 새로운 기술에 대해서 공유하고, 또 내가 부족한 지식들에 대해 힌트를 주는 등 나에게 많은 도움을 주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센트럴에스티의 동료들은 드림팀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기본적인 기술 수준과 배움에서 아주 뛰어났던 것 같다. 그저 그들과 함께 했던 것만으로도 나는 성공을 경험했으니...


CSR 프로젝트에서는 어두운 면도 있었는데, 바로 나의 경력을 속이고 일을 했던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LG텔레콤 직원에게 아직 학교를 졸업하지 않았음이 들통났을 때는 심한 소리를 듣기도 하였으며, 고졸, 전문대 출신들이 차별 받는 것을 목격하면서 대기업에서 학력의 벽이 얼마나 큰 지 실감할 수 있었다.
 결국 나는 그간 간과했던 학사 학위라는 것의 중요성을 깨닫고, 최대한 빨리 졸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우리 학교는 산업대학교였기에 산업대학교간 전학이 자유로웠다. 서울산업대로 전학을 하려고 했는데 마침 그 학기 부터 주간학생이 야간으로 전학이 안되는 규정 때문에 계획은 실행할 수 없게 됐다. 주간으로 학교를 다니게 되면 생활비를 감당할 수가 없으니까...

부산으로...

 병역특례로 일하던 나는 LG텔레콤에서 불법파견 근무가 적발되어 이직을 명령 받게 된다. 이것이 기회다 싶어 2002년 2학기가 시작한 지 조금 지나 복학을 하였다. 이직 기간으로 6개월이라는 여유가 주어지기 때문에 그동안 한학기라도 마치며 부산에서 직장을 구할 생각이었다.

 부산으로 향하게 된 더 큰 이유가 있는데, 몇달 전에 어릴 적에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떨어져 사시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게 되었다. 어릴 적도, 또 당시까지도 무척이나 어렵게 살아왔지만 나를 잡아주었던 버팀목이 되주었던 어머니이다. 우리가 가난해서, 또 희망이 없어서 우릴 떠난 어머니에게 부끄럽지 않은 모습으로 당당히 성장한 나의 모습을 보여주며 당신의 품으로 돌아가리라고 마음 먹고 있었고, 이젠 그 모습에 다가갔다 생각 했을 때 쯤 세상을 떠나셨기에 나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 였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어머니 또한 경제적으로 기반을 다지신 뒤에 우리를 찾기 위해 식당 잡부에서 식당 주인이 되기까지 밤낮없이 일하셨다고 한다. 돌아가신 시점이 이제 막 어머니의 식당을 갖게 되어 개업하기 직전이었다. 그리고 동생과는 연락이 막 닿았고 나의 행방도 수소문하고 계셨고... 이러한 일을 겪었기에 남은 가족들의 소중함을 되새기며 그들과 함께하기 위해 부산행에 힘을 실었다.

 3년의 직장 생활을 거치면서 외형적으로는 많은 성장을 하였지만, 내가 느끼기에 달라진 것은 거의 없었다. 여전히 머릿속은 텅비어있고, 첫걸음때 처럼 남에게 의지하고, 스스로는 아무 것도 하지 못하며, 그저 운이 정말로 좋았고 치부를 들키지 않으며, 살얼음판을 걷듯이 간신히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이었다.

 복학한 학교는 신세계였다. 1, 2학년을 지나는 동안 열등생으로서 F학점을 면하는 정도에 만족하던 내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수업을 따라 갈 수 있다는 것에 놀랐다. 직장 생활을 하는 동안 그 때 그 때 위기를 면하기 위해 주워 듣고 익힌 것들이 이론적으로도 뒤떨어지는 것이 없다는 사실에 고무되었고, 내 인생의 키워드라 할 수 있는 "자신감"을 이 시기에 처음으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내가 잘할 수 있는 과목(데이터베이스, Unix, Java 등)만 선택한 것이 작용했겠지만...

 그렇게 한 학기를 마치고 겨울이 지나고 다시 봄이 오려고 하는 무렵. 아직 이직할 곳을 찾지 못했다. 서울과 부산은 나 같은 일을 하는 사람에겐 너무나 다른 환경이었다. 서울이 기회의 땅이라명 부산은 황야라고나 할까... 어딜가도 월급 100만원 이상 주겠다는 곳은 없었고, 심지어는 병역특례니까 무임금으로 일해 달라는 곳도 있었다. 그래도 계산해 보니 월급 100만원이면 학비와 생활비 정도는 감당될 것 같아 이직 만료 시한 막바지에 아슬아슬하게 부산 대연동 남구청 앞 얼핏 보면 빌라 주택같은 3층 건물에 위치한  "애드뱅크"라는 곳을 선택했다.

애드뱅크

 애드뱅크가 하는 일은 홈페이지 구축이었다. 출판물 디자인에서 출발한 회사로 인터넷 사업을 본격화한지는 얼마안 된 아주 자그마한 회사. 너무나도 가족적인 분위기에 감탄했는데, 정말로 가족이 운영하는 회사라는 건 조금 지나서 알게 되었다. 입사 면접 시에 보통 회사 와는 다른 전형 절차가 하나 있었는데,  건물 한층 아래 맥주 집에서 취중면접을 하는 것이었다. 그만큼 회사가 인간적인 면모에 가치를 두었다.
 나는 여기서 처음으로 내가 일을 주도하는 경험을 하게 된다. 프로그래머가 2~3명이긴 했지만 각자 맡는 일이 달랐기 때문에 개인에 주어진 프로젝트에서 프로그래밍 부문은 모두 전담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프로그래머 수가 적었기 때문에 기술 전문가로서 협상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도 주어졌는데, 이 또한 다른 곳에선 할 수 없었던 경험이었다.
 앞서의 회사에서 한 일들에 비하면 사소할 수도 있지만, 내가 주도권을 쥐고 다양한 시도와 개선을 할 수 있었던 점은 아주 값진 것이었고 훗날의 내 모습에 많은 변화를 가져다 준 계기가 되었다.
 2004년 3월 20일 병역특례 복무만료가 되면서 회사를 떠나기로 하였다. 애드뱅크의 사장님은 나에게 박사학위까지의 학자금 지원과 연봉 250%인상등의 좋은 조건을 제시해주셨으나, 작은 현실에 만족하기엔 내 열정의 그릇에 맞지 않았기에 인사를 건내게 되었다.
 애드뱅크를 맘편히 떠날 수 있었던 것은 재직 중 입사한 윤일(Ray yoon, 현. Yahoo!)씨가 프로그래머로서 굉장히 뛰어난 역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별 걱정없이 떠날 수 있었다.
 윤일씨는 이후에도 계속 연락을 유지하며 지내고 있고, 신기술에 대한 얼리어댑터로서 본받을 점이 많은 분이다.  이야기하는 김에, 애드뱅크에서 만난 한영훈(현. NHN)씨도 열정으로 가득찬 모습으로 나를 자극하고 감동받게 해주었던 기억을 전한다. 이전에 성인물을 다루는 음지의 회사에서 양심적으로 일하기로 마음먹고 좋지 않은 조건에도 몸을 사리지 않으며 수많은 프로젝트를 초인적으로 소화했다.
 그리고 나는 애드뱅크에 재직하는 동안에는 아무도 모르게 (그만큼 회사 일에 소홀하지 않았다는 이야기) 야간에 수업을 들어서, 퇴사 후에는 마지막 학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다음커뮤니케이션

 지금까지 조금 지루한 과거사였다면, 이제부터가 나의 프로그래머서의 인생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점이다.

 마지막 학기는 몇학점 남겨놓지 않은 상황이고 졸업논문은 이미 다 써두었기 때문에 학기가 끝나는 시기에 맞추어 취직하고자 마음먹었다. 어헤드모바일로 다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지만, 재직중인 직원분으로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이왕 이렇게 된 것 신입의 마음으로 넓게 생각하고 다양하게 도전 해보고자 계획했다. 마침 대기업의 공채도 활발하고 해서 나는 여러 군데 입사지원을 하기로 한다.

 대기업의 필수 조건은 토익이라고 해서 마음먹은 즉시 원서를 접수했는데, 이전의 모의고사에서 300점도 안되는 점수가 나왔기 때문에 첫시험에서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다가 정확히 600점이라는 점수를 받고서 대기업 지원의 자신감을 갖게 되었다. (당시 대부분 회사는 토익 점수 600점이 커트라인)

 내가 신입/경력 가리지 않고, 입사 원서를 넣은 곳은 1,000곳 정도 될 것이다. 국내에서 이름 들어보았을 모든 회사에는 빼놓지 않고 모두 지원했다. 그 결과, 서울에서 면접을 보기 위해 부산에서 서울까지 KTX 기차와 고속버스를 몇번을 탔는지도, 찜질방에서 며칠을 보냈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많은 곳에 면접을 볼 수 있었다. 심지어는 하루에 4군데 면접을 보기도 했을만큼...

 하지만  합격한 곳은 단 두 곳. 먼저 발표 난 곳이 LG 전자였다. 여의도의 쌍둥이 빌딩에서 홈오토매이션 분야에서 일할 수 있는 기회였는데, 합격 소식을 전해들은 우리과 권순량 교수님께서는 만약 LG전자에 입사하면 학교 입구에 플래카드를 걸어주겠다는 약속까지 해주셨다.

 그렇지만 아시다시피, 결국 난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선택하게 되었다. 그동안 웹 관련 분야에 종사해오면서 (적어도 내가 보기엔) 그 분야에서 기술적으로 다음이 가장 앞서 있었기에 동경해 왔고 , "즐겁게 세상을 변화시키자!" 라는 목표아래 즐겁게 일할 수 있는 다음이 나에게 더 맞을 것이라 생각되어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되었다. 이 회사에 합격한 것은 그야말로 행운이었는데, 앞서도 여러번 이야기 했듯이 나는 정말 평균이하의 실력을 가진 둔재였기 때문이다.

 서류 통과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면접을 보기 위해 역삼동 데이콤빌딩에 있는 다음커뮤니케이션을 찾았다. 말끔한 대기실에 앉아 음료수를 마시며 면접관을 기다는 중, 앞에 있는 다음검색엔진 제품 포스터를 보고 있었다. 당시 검색엔진은 독일기술의 "파이어볼" 이라는 제품이었는데, 속으로 "검색엔진 이름이 파이어볼? 불.....알? 하하.." 하며 깔깔대고 있던 차에 면접관이 와서 당황한 나를 맞이한 건 유지형 팀장님. 면접실로 이동하여, 전형을 시작했다. 시험을 볼 것이란 얘긴 없었는데, 갑자기 시작하겠다며, 문제지를 꺼내는 지형님 (다음은 수평조직문화를 가지기 때문에 이름+님 의 호칭으로 부른다.). 조금은 당황하였지만, 그래도 짧으나마 경력도 있고, 전공자이기 때문에 어렵지 않게 통과할 것이라 예상했다. 문제는 자바 기초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는데, 예를 들면, 추상클래스와 인터페이스의 차이, synchronized 키워드, thread 에 관한 것들 등. 분명히 다 배웠던 것이고, 2001년에 SCJP자격증(이것도 행운)도 땄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받은 점수는 "0" 점이었다. 단 한문제도 풀지 못한 것이다.

 당연히 떨어진 줄 알았는데, 합격이라니... 아직도 내가 왜 합격하게 됐는지 모른다. 지형님께 어렵게 물어봤는데, 그저 열심히 하라는 말씀만 해주셨다. 후에 보게된 드라마 "신입사원"에서 얼마나 공감을 느꼈는지....

 무언가 오류가 있었을 지도 모르지만, 난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지금까지의 나와는 180도 달라진다.

댓글

  1. 차비가 없어 외출하지 못할 땐 평소에 안 보고 안 듣던 주위의 공기를 느끼게 되지 않소? 마치 시간 가는 소리가 부웅 하고 들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드는게, 마치 내가 서 있는 곳이 내가 살던 곳이 아닌 양 새로운 세상으로 보이는 것 같은 기분. 나만 그런가...

    2000년에 나도 오라클 빌딩이 보이던 곳에 잠시 있었는데, 출근하는 길에 보는 현대 백화점 주차장 안내하는 아가씨가 무척 예뻤던 기억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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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흡흡?? 다음편은 언제 연재 하나여...

    아 빨리 연재 해주세요. 현기증 난단 말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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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영어는 어떻게 해결하신건지도 자세히 적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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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 좋네요..
    스타트업 회사에서 200 여명의 회사로 성장할 수 있는 경험..아무나 해볼수 있는게 아닌데..부럽네요. ^^

    p.s 저도 영어는 어떻게 해결하신건지 궁금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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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 다음 편이랄 건 없구요. 오늘 중으로 다 풀어보려고 합니다. 사실 별 내용이 없어서 고민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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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 과거에는 자주 그런 느낌을 가졌습니다.

    생활이 풍요로워지면 정신과 감성은 퇴보되나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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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아마 당시에 시작하셨다면 거품을 타고 경험해 보실 수 있었을텐데... 값진 경험이었고 교훈도 많이 얻었습니다. 요즘은 살아남는 것 자체가 어려운 시기라 상황이 조금 다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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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 제 비결에 아마 깜짝 놀라실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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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 아 머라 적어야할지 모르겠네요
    저같이 생각없이 놀기만했던 중생은 부끄럽사옵니다
    근데 영어 얘기는 먼지 궁금하네요 나머지 내용도 기대기대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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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 돈을 벌만큼 벌었다니... 얼마나 버신 거에영?
    네이버랑 블리자드에서 몇년만 일하면 그렇게 되낭
    최소 10 0000 0000은 벌어야졍

    PS) 금칙어 찾아서 글 수정하는 거 개고생이네요
    엔에이치엔이 왜 금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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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 설마 다음부터는 안올리시는 것?

    NHN과 블리자드의 이야기도 올려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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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영어 마스터 방법이 궁금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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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 지나가는학생 ㅠ2009년 10월 18일 오전 8:29

    검색도중 우연히 들어오게되었습니다~

    다음이야기 정말 궁금하네요~;; 댓글을 읽어보니 와 NHN 블리자드 !!!! ㄷㄷㄷ

    이야기 더 듣고싶어요 ㅠㅠ

    프로그래머로서 어떻게 공부를 하셨고 그리고 프로그래머로서 겪게 된 고민이라던지. ㅠ 예를 들면 말이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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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이쯤되면.. 약간 자기도모르게 거만한 문장이 한두줄쯤 들어가기 마련인데..
    천성이 겸손하신 듯....
    보기와는 다르게 가정환경도 참 우여곡절이 많아 보이네요.
    하튼 잘 보고 갑니다...

    행복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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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지나가는학생 ㅠ2009년 11월 6일 오후 11:32

    업데이트는 왜 안되는걸까요 ㅠㅠ 흑흑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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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아직까지도 후속글을 안썼다니...
    하루 안에 다 쓴다고 해놓고 두 달이 지났군.
    쓰는 거야 자기 맘이기는 하지만, 약속이나 하지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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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두달이 다되가네요;;; ㅠㅠ

    기다리는것도 힘드네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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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끈기를 가지고 기다립시다.. 이미 이 정도만으로도 모두들 큰 도움이 되었을꺼라 생각되는데 fguy님의 자서전의 다음 얘기가 아무리 길어진다고 하더라도 이건 개인 블로그에 작성하는 개인의 얘기이므로 거기에 대고 항의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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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안녕하세요. 우연히 블로그 글을 보고 감명 깊게 읽었습니다.
    제발 후속편 좀 올려주세요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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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 처음 이글을 본게 작년 10월... 그리고 현재 3월. 6개월 남짓 기다리면서

    아 나의 참을성이 어느정도인가 시도해보면서.. 혹시나 이글을 보시고 ..

    그뒤 이야기를 써주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아직 정성이 부족한가 봅니다 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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