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크기


"그래서, 다음은 어디로 가세요?”

 퇴사 후 오랜만에 만난 동료가 식사 자리에서 물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회사 이름을 말했다. 그는 나를 보다가 되물었다.

"거기? 왜?"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최소한 몇 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 년 전, 나름의 뜻을 품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금세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다. 그때 얻은 결론은 간단했다. 한국은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 결론은 꽤 오래갔다. Zoox 와 Embark Trucks 자율주행회사. 실리콘밸리에서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나갔다. 다만 마음 한편에는 풀리지 않은 매듭이 남아 있었다. 그때의 결론이 한국에 대한 것인지, 그 시절의 나 자신에 대한 것인지, 솔직히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쿠팡에 합류한 건 그 매듭을 풀어보려는 시도였다.

 결과부터 말하면, 매듭은 풀렸다. 

 한국에 본사가 있지만 시애틀, 베이징, 방갈로르에 엔지니어링 조직이 퍼져 있고, 업무의 많은 부분이 영어로 진행되는 곳. 피크 시즌 트래픽이 평시의 수십 배로 튀어도 견디는 시스템, 수백 개의 마이크로서비스가 맞물려 돌아가는 런타임, 한 줄의 쿼리 변경이 수천만 건의 일별 주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숫자로 설명해야 하는 설계 리뷰. Sr. Staff 으로서 아키텍처를 책임지고, 여러 팀의 설계에 개입하고, 리더십 역할까지 감당하면서, 나는 실리콘밸리에서 봤던 수준의 엔지니어링이, 한국을 거점으로 한 조직에서도 상당히 유사 작동하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가능하다. 이미 하고 있다.

 그 답을 확인한 순간부터, 묘하게도 다른 질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기? 왜?"라는 그날의 질문에, 나는 아마 이렇게 답했어야 했다. 

 내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권한을 가졌던 시기 중 하나였다고. 직함이 주는 권한, 조직이 위임한 의사결정의 범위, 내 판단을 신뢰하고 따라주는 동료들까지. 객관적으로 보면 부족할 것이 없는 환경이었다고.

 부족한 것은 내 쪽에 있었다. 정확히 말하면, 내가 그리는 그림의 크기였다.

 들여다볼수록 나는 내가 만들고 싶은 것이 주어진 권한의 범위 안에서 끝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내가 그리고 싶었던 건 특정 도메인의 아키텍처가 아니라 한 조직의 엔지니어링 문화 그 자체였고, 한 시스템의 개선이 아니라 시스템이 만들어지는 방식 전체였다. 어느 자리에 가더라도 그보다 작은 권한은 늘 있었을 것이고, 어느 조직에서도 그보다 큰 권한은 쉽게 주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쿠팡의 문제가 아니라 욕심의 문제였다.

 성숙한 조직에는 성숙한 조직의 논리가 있다. 수만 명이 같은 방향을 보게 하려면 프로세스가 필요하고, 프로세스는 시간이 쌓일수록 단단해진다. 그 단단함이 곧 조직의 신뢰성이고 실행력이기도 하다. 그 체계 안에서 시니어 엔지니어로 일하는 것은 그 자체로 의미 있고 도전적인 일이었다. 부정할 이유가 없다.

 다만 내가 커리어의 이 지점에서 마주한 질문은 조금 달랐다. 기존 시스템 위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과, 시스템의 모양 자체를 처음부터 함께 만드는 것. 잘 정비된 배의 선임 항해사로 남는 것과, 아직 완성되지 않은 배의 설계에 참여하는 것. 두 선택지의 무게는 사람마다 다를 것이다. 나에게는 후자의 무게가 더 무거웠다.

 내가 원하는 것이 조직 안에서 허락된 것보다 커졌다는 것. 이걸 깨달은 순간부터, 다음 자리를 찾는 건 더 이상 가정이 아니라 시간의 문제였다.

 글로벌 자본과 이미 완성된 문화의 뒷받침 없이도, 같은 수준의 엔지니어링이 가능할까. 그리고 그 가능성을 만드는 과정 전체에, 내가 더 깊이 새겨질 수 있을까.

 이 두 개의 질문이 겹쳐지는 지점에서, 다음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결국 이건 성숙의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10년 전의 나였다면 익숙한 곳에 남아 익숙한 방식으로 가치를 쌓아가는 쪽을 택했을 것이다. "매니저가 되는 게 자연스럽다"는 조언에 못 이기는 척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나는 직함이 아니라 문제의 종류를 기준으로 자리를 고르고 싶다.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문제, 내가 아직 잘 모르는 문제, 그리고 내 선택이 곧 결과로 이어지는 속도의 문제.

 리더냐 실무자냐의 이분법도 오래전에 놓았다. 좋은 리더는 두 가지 모두에 진심인 사람이고, 좋은 실무자는 팀 전체의 성과에 관심 있는 사람이다. 두 역할은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다. 오히려 서로를 필요로 한다.

 라포랩스를 처음 봤을 때, 그저그런 수 많은 여성 쇼핑앱 중 하나겠거니하고 지나쳤다. 우리부부의 연령대인 4050 대상이라는 문구에 솔깃하여 스크롤을 올려, 자료를 하나씩 읽어 내려갈수록 이야기가 달라졌다.

 처음 눈을 끈 것은 규모였다. 월간 활성 이용자 300만, 누적 거래액 1조 5천억, 지난해 매출 856억, 입점 브랜드 8천 개, 홈쇼핑 7사 연동, SK스토아 인수. 작지만 단단한 초기 스타트업도 아니고, 이미 완성된 대기업도 아닌 그 사이 어딘가. 중견 기업의 복잡도를 감당하면서도 스타트업의 속도를 유지해야 하는, 공학적으로 가장 까다로운 구간에 있는 조직이었다.

 그 다음 눈을 끈 것은 AI를 다루는 태도였다. 유행어를 뿌리는 방식이 아니라, 글로벌 모델이 상향 평준화되는 시대에 지역의 맥락과 데이터를 해자로 삼겠다는 관점. 에이전틱 커머스로의 전환, 멀티 채널 확장, 뷰티·리빙·식품으로의 카테고리 확장. 플랫폼이 감당해야 할 복잡도는 앞으로 폭발적으로 커질 것이고, 그 복잡도를 다루는 일이야말로 커머스 플랫폼 엔지니어링의 본질이다.

 하지만 결정적이었던 건 조직이 일하는 방식이었다.

 비슷한 규모의 한국 스타트업은 여럿 있고, 비슷한 성장 속도를 보이는 회사도 적지 않다. 내가 라포랩스에서 본 차이는, 조직 운영의 철학을 구호 수준에서 끝내지 않고 제도와 구조로 밀어넣어 놓았다는 점이었다. 자율성과 얼라인먼트 사이의 긴장을 회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다루는 방식, 그 긴장을 공개된 글로 솔직하게 풀어내는 태도, 그리고 그것이 실제 일하는 방식에 반영되어 있는 흔적. 많은 조직이 "자율"이나 "빠른 실행" 같은 단어를 쓰지만, 그 단어들이 매일의 의사결정 구조까지 내려와 있는 경우는 생각보다 드물다.

 내가 쿠팡에서 느꼈던 아쉬움 ‘좋은 의사결정이 여러 층을 거치며 속도를 잃는다는 감각’ 이 여기서는 구조적으로 다르게 풀려 있었다. 물론 이 방식에도 그 나름의 리스크가 있다. 자율성이 지나치면 전사 방향과 어긋나고, 얼라인먼트를 지나치게 강조하면 자율성이 무력해진다. 그 긴장을 매일 조율해나가는 일이 곧 조직의 엔지니어링이다. 그리고 그 조율을 의식적으로, 지속적으로 해나가려는 의지가 보였다는 것이, 나에게는 가장 설득력 있는 신호였다.

 그리고 내가 맡게 된 Commerce Platform은 그런 조직이 딛고 서는 땅이다. 주문/결제/정산/물류/혜택. 모든 팀이 공통으로 의존하는 코어 도메인. 트래픽이 빠르게 늘어나면서 따라오는 문제, 도메인이 고도화되면서 더 복잡해지는 문제. 팀들이 자율적으로 빠르게 움직일 수 있으려면, 그들이 딛고 서는 플랫폼이 먼저 단단해야 한다. 자율성은 공짜로 오지 않는다. 누군가는 그 자율성을 가능하게 하는 기반을 책임져야 한다.

 그 역할을 맡게 되었다.
 Commerce Platform Team Leader. 직함은 리더지만, 이 자리를 받아들인 이유는 리더로 굳어지지 않아도 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아키텍처를 고민하고, 필요하면 코드에 손을 대고, 팀의 기술적 문화를 함께 세우는 일. 실리콘 밸리와 쿠팡에서 익힌 글로벌 스케일의 엔지니어링 감각을, 훨씬 더 밀도 높은 영향 범위에서 적용해보는 일.

 첫 몇 주 동안 코드베이스와 씨름하면서, 고쳐야 할 것과 지켜야 할 것의 목록이 빠르게 쌓여갔다. 쉬운 일은 하나도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게 좋다. 내 선택이 내 책임으로 직결되는 감각을, 오랜만에 다시 느끼고 있다.

 그날 저녁, 그 동료에게 내가 실제로 했던 대답은 훨씬 짧았던 것 같다. "만들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대충 그런 식이었다. 길게 설명해봤자 구차해질 것 같아서였다.

 이 글은 그때 하지 못했던 긴 대답이다.

 잘해내리라는 보장은 없다. 이전 선택들에서도 그랬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다만 내가 증명해보고 싶은 것은 이제 꽤 구체적이다. 실리콘밸리의 좋은 조직들이 당연한 것처럼 가지고 있는 것들. Servant Leadership, Influence without Authority, multiplier로서의 시니어, 의사결정을 기록하고 되짚는 문화, 실무와 리더십이 분리되지 않은 커리어 경로. 이런 것들이 한국의 중견 스타트업이라는 서로 다른 토양에서도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것. 개념을 수입해 용어로 남기는 수준이 아니라, 매일의 설계 리뷰와 코드 리뷰와 1 on 1에 스며들게 만드는 것. 한국 조직의 강점인 속도와 실행력을 잃지 않은 채로, 실리콘밸리에서 본 엔지니어링의 기준을 이곳의 일하는 방식으로 번역해내는 일. 피크 트래픽을 견디는 일, 복잡한 정산 로직을 틀리지 않게 굴리는 일, AI를 기존 시스템에 자연스럽게 녹이는 일 같은 기술적 과제들은 그 문화가 자리 잡은 자리에서 자연히 따라오는 결과물이라고 믿는다. 나는 그런 팀을 만들고 싶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언젠가 한국의 시니어 세대가 AI 에이전트와 대화하며 쇼핑하는 그 순간의 뒷단에, 우리가 함께 만든 플랫폼이 돌아가고 있기를 바란다.

 그 과정을 함께할 동료를 찾고 있다.
 Spring Boot / Kotlin / MSA 기반의 커머스 플랫폼을 함께 설계하고 만들어갈 백엔드 엔지니어. 한 번의 잘 짠 코드보다 팀이 지속적으로 잘 짠 코드를 만들어내는 환경에 관심 있는 분. 실리콘밸리식 엔지니어링 문화의 좋은 점들을 한국적 맥락에서 실제로 작동하게 만드는 실험에 같이 참여하고 싶은 분. 돌아가는 시스템에 만족하지 않고 더 좋은 시스템으로 바꿔내는 데 즐거움을 느끼는 분. 직함보다 문제의 종류로 자리를 고르는 분이라면 특히.
 편하게 연락 주시기 바람. 오래 미뤄두었던 질문에, 이제야 제대로 답할 때가 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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