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행

 어느덧 내가 한국을 떠나 미국에 온 지 만 5년이 넘었다. 지난주에 참가한 "2016 글로벌 기업가 정신 캠프" 이후로 몇몇 참가자로부터 어떤 계기로 미국에 오게 된 건지, 준비는 어떻게 한 건지 질문을 받게되었다. 그에 대한 답을 정리해볼까한다.

 처음 미국 취업과 인연을 맺게된 건 우연히 받게 된 다음 이메일 덕분이었다.


 이메일 발신인과는 일면식도 없으며 성의 없는 이메일을 그냥 지나칠 법만 하건만, 연말에 심심하기도 하고 해서 나도 성의 없이 답장을 보내보았다. 당시 NHN이라는 안정된 직장에서 좋은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던 나였고 영어 한마디 해 본적 없었기 때문에 전혀 진지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 NHN의 경력 덕분인지 이내 면접 일정이 잡히고, 주말에 달리 할 일도 없고 해서 어느 일요일, 마포에 있는 한국 산업 인력공단 별관에 위치한 해외취업지원센터로 향했다.
 대학교 영어수업 이래 처음으로 외국인과 마주해 보았고, Hello 를 제외하곤 벌벌 떨며 한마디도 못했다. 무어라 말은 할 수 있을 것도 같았는데, 면접관이 하는 말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어서 포기하고 그대로 면접을 마치고 나왔다. (아마도) 친절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면접을 마칠때까지 무슨 회사인지도 몰랐다.
 그렇게 망신 당한 경험을 잊고 지낸지 몇 주쯤 지났을까? 한통의 이메일을 받게 된다.


 면접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지원자에게 입사제의를 하는 회사였을까? 현와이프, 당시 여친에게 말도 안되는 일이 일어났다며, 비자도 해준다는데 속는 셈치고 가보는 건 어떨까 하며 제안을 해보았지만, 여러 정황상 당장 미국으로 가기는 어렵다는 결론을 내리고 황당한 입사제의를 거절하게 된다. 물론 영어로 이메일 쓰는 건 어려워서 한국산업인력공단 직원을 통한 거절이었다.

 이렇게 맘에도 없는 면접을 본 것은 훗날 큰 자산이 되었다. 어느날 문득 국내에서 해 볼만큼 해보았고, 나 같은 인재는 국제적으로 놀아야한다는 망상에 사로잡혀, 세계적인 게임회사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에 지원을 하게 되었는데, 인사담당자로부터 본사와 커뮤니케이션이 많아 영어 실력이 중요하므로 객관적인 증빙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영어 시험을 쳐본적은 있으나 점수는 쓸모없는 수준. 이때 Sozoh 로 부터 받은 오퍼레터가 마치 조커 카드처럼 빛을 발했다. 미국에서 입사합격 결정을 받을 정도면 영어 소통엔 문제가 없을 것이니 OK라는 답변이 왔다. 이후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 면접에서 원어민과 면접을 보아야 하는 결정적인 위기를 맞이 했으나, 면접 전날 상가(喪家)에 다녀와 컨디션 문제로 영어가 잘되지 않는다는 말도 안되는 핑계로 위기를 모면. 내 인생에서 2년 가까이를 블리자드 엔터테인먼트와 함께하게 되었다. 다행히 회사에는 한국어 영어 모두 잘하시는 분들 (PM)이 계셔서 그 분들을 통해서 본사와 잘 소통하였다.

 애초에 입사때부터 본사행을 계획했으나, 외국계 회사를 다녀도 영어는 전혀늘지 않고, 어떠한 계기로 본사행이 좌절된 와중에, 블리자드 경력을 바탕으로 동종업계에서 고액연봉과 함께 스카웃 제의를 받게 되었다. 그곳이 한국 경력의 마지막인 네오플. 넥슨에 막 인수되어 호시기를 맞이 하고 있던 때에 고급 인재 확충 차원에서 내게 기회가 온 것이었다. 당시 넥슨 계열사중에 가장 좋은 실적을 내고 있었고, 업무 분위기도 좋아 방황을 끝내고 정착하려 마음 먹었다.

 블리자드 입사전부터 건너 건너 건너 건너 알게된 Soompi 라는 회사의 Joyce Kim 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Soompi 는 한류 컨텐츠를 다루는 커뮤니티 웹사이트. 2008년말 Skype 를 통해 한국말로 간단히 면접을 보고 입사제의를 받았지만, 한국을 떠날 아무 준비도 되지 않아 완곡히 거절하였다.
 약 일년 뒤 네오플에 잘 다니고 있던 중 한국 올 일이 생겼다며 얼굴 한 번 보자는 것이다. Joyce 의 화려한 언변에 호기심이 발동했다. 실리콘밸리 기술 기업 관련 TV쇼 (기가옴쇼) 진행자였던 자신이 실리콘밸리 유명인사들과 잘 알고 있고, 책이나 뉴스에서만 보던 실리콘밸리를 경험시켜준다는 유혹에 그만 넘어가고야 말아 오퍼레터에 사인하게 되버리고 만다. 솔직히 직원 세명의 그의 회사는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지만...

 하지만 현실은 현실. 비자가 나오고 입사 날짜가 다가올수록 의심은 짙어만 갔다. 완성도 떨어지는 웹사이트에 변변치 않은 사무실을 가진 직원 세 명의 회사. 여전히 난 매우 안정적이고 전망있는 네오플이라는 회사를 잘 다니고 있었고, 내적갈등이 계속되던 순간. 넥슨 인수후 불만을 가진 대부분의 네오플 직원들이 새회사로 이동하겠노라고 공표해서 회사가 혼란하게 되었다. 새회사로 옮기자는 제안도 받았지만, 기왕 이렇게 혼란스럽게 된 거 아직 젊으니 잃을 것 잃더라도 다시 일어서지라는 용기로 미국 한 번 가보자며 와이프를 설득한 것이 Soompi 입사일로부터 2주 전. 여전히 준비한 것도 없고 준비할 여유도 없었지만, 결정하고 나니 마음이 한결 가벼웠다. 직접 보고 실망하거나 적응하지 못하더라도 약 일년간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미국 길게 관광하는 마음으로 다녀오자는 마음으로... 짧은 시간동안 한국의 모든 것을 정리하고 떠나게 되었다. 미국에 대해서 아는 게 전무한 채로.

 여기까지가 미국으로 가게 된 계기이고, 무엇을 준비하였는가에 대해 답해 보자면, 아무 것도 없다. 영어는 어떻게 하냐고? 미국 땅을 밟는 그 순간까지 영어공부 해 본적 없다. 미국 비자 인터뷰때 친절하게도 대사관 직원이 한국말로 인터뷰하고 난 후, 번개같이 무언가를 영어로 물어보았는데, 무슨말인지 모르겠다고 하니 미국가서 영어 공부 많이 해야겠다고 한마디 해 줄 정도. 와서 살다 보면 하게 되더라. 굳이 무엇을 준비해야 하냐고 묻는 다면 되던 안되던 시도해보는 용기나 배짱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다.

 그리고 떠나오기 전 했던 걱정들은 모두 부질 없던 것이었다. 내가 가진 작은 것들 버려도 상상도 못했던 큰일을 이룰 수 있는 실리콘밸리는 기회의 땅이고 이민자들이 절대 다수인 캘리포니아는 나에게 무한히 친절하고 관대해서 돌아보면 훌륭한 결정이었다. 물론 실리콘밸리 유명인사들도 충분히 만나고 이 곳 문화에 대해 깊이 이해할 기회도 부족하지 않게 얻을 수 있었다. 저질러보고 후회 하려 했는데, 그럴 일은 없었다. 그래도 한 가지 후회하는 게 있다면, 왜 좀 더 일찍 저지르지 않았나 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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