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강신청 해프닝
때는 2003년 여름 방학 중. 조만간 개강을 맞아 수강신청 대란이 예기되었다. 나는 아직 병역 특례로 회사를 다니고 있었기에 학교를 동시에 다니려면 야간 수업을 들어야만 했다. (우리 학교는 산업대학교 분류에 속했기 때문에 야간 수업이 꽤 있었음) 하지만 야간 수업의 우선권은 야간반 소속학생들에게 있었고 내 차례가 올때쯤엔 거의 남아 있는 수업이 없을 것은 자명한 사실이었다. 교무부를 찾아가 사정을 이야기하고 방법을 강구해보았으나 원칙을 들어 내 요청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만 확인하였다.
회사 생활을 하며 고졸로의 설움을 종종 느꼈던 바, 하루라도 빨리 졸업을 하자고 마음 먹고 있었기에 좌시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시간은 빨리 흘러 대책없이 수강신청 시스템이 열렸다. 수강신청 전용 컴퓨터가 있는 학교 전산실애서 접속이 가능해지자마자 서버로 가는 패킷을 스니핑 했다. 프로토콜을 파악하고 내 유닉스계정에서 요청을 재현하기까지 10분 남짓 걸렸을까. 몇가지 방법으로 요청을 조작해 보고 주야간 수업 구분은 서버쪽에선 검증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쉽게 찾아내었다. 또한 대부분의 검증(Validation)이 클라이언트쪽이었다는 것도... 간단히 손에 익은 자바 코드로 명령행인터페이스 프로그램을 만들었고, 내가 원하던 수업 모두 성공적으로 수강신청을 마치고 서둘러 자리를 떴다. 왜냐하면 곧 구여친, 현와이프가 서울에서 날 보러 온다는 연락이 왔었기 때문이다.
이후 며칠간 여름휴가차 친구들과 거제도로 바캉스를 떠났었고, 내 휴대폰은 바닷물을 먹어 고장이 났으나 평소 연락오는 곳도 별로 없어 그다지 신경쓰지 않았다.
휴가를 마치고 집에 오늘길에 동행했던 친구가 충전기를 가져오지않아 배터리를 아끼고자 꺼놓았던 휴대폰을 켜자마자 학교에서 연락이왔다. 전원 당장 학교로 오라는 연락이었다. 영문도 모른채 살을 검게 태우고 도착한 학교는 아수라장이 되어있었다. 이번 수강신청이 무효라는 것이다. 내가 만든 프로그램을 삭제하지 않고 자리를 뜬게 원인이되어 해당 프로그램이 삽시간에 (아마도 디스켓 복사) 학교전체로 퍼져 수강신청내역이 꼬일대로 꼬였다는 것이다. 학생 전원에게 프로그램 사용여부를 설문한 결과 절반 이상이 사용했다고... 해당 학생들에게 경위를 물어 수사한 결과 나를 특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주범인 나는 학과장(?) 사무실로 홀로 호출되어 반성문을 쓸 것을 종용받았다. 반성문을 잘 쓰더라도 징계를 면할 수는 없을 것이고 최악의 경우는 퇴학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반복해서 이야기들었다. 같은 시간 친구들도 다른 장소에서 경위서를 쓰고 있었다고 한다.
무서우면 용감해진다던가. 나는 개인적인 사정을 알아주지 않은 학교의 무정함을 역설하고 잘못한 것이 없노라며 반성문 작성을 강하게 거절하였으며, 내 수강신청 내역이 취소된다면 보안에 소홀한 학교측을 언론 및 교육당국에 제보할 것이라며 협박 아닌 협박을 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먼길 오느라 밥먹을 시간이 없었으니 짜장면을 시켜줄 것도.
금새 배달온 짜장면과 함께 길지 않은 시간내에 요구는 받아들여졌고, 학교측에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조건이었다. 결과적으로 전교생 절반이상인 자백한 학생들 중 유일하게 수강재신청을 하지 않았으며, 주경야독끝에 수많은 낙제학점에도 불구 평균보다 한학기 일찍 졸업할 수 있었다.
훗날 10년도 훨씬지나 동창친구 명재를 만나 들은 얘기로는 친구들의 구명운동도 있었다고 한다. 다수의 탄원서가 교수진들에게 전달되었고 자신이 생각할 땐 그 덕에 내가 징계없이 학교를 잘 졸업할 수 있었을거라고... 정확한 진실은 세월탓에 모르겠지만 친구들에게 고맙고 학교에도 고맙다. 까맣게 잊고 지내던 이 사건을 얼마전 고국방문때 만난 명재덕에 회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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