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 진학

중학교 시절 나는 공부를 해 본 기억은 없다. 오락실에서 살다시피 했고 롤라장에 재미를 붙여 수업시간외엔 교과서를 들여다 볼 일이 없었다. 노느라 바빠서 방과후에 숙제를 할 생각도 못해봤다. 덕분에 매는 달고 살았고...
하지만, 그때의 나는 공부를 썩 잘하는 편이었다. 반에서도 항상 상위권이었고, 전교에서 한자리 등수도 해본 적이 있을만큼. 나만의 독특한 공부법이 있었다. 서울에서 전학온 내가 부산의 거친 친구들과 어울리기 위해서 불량해 질 필요가 있었는데, 그 방법 중 하나로 수업시간에 항상 엎드려 자거나 바닥만 쳐다보곤 했다. 그러면 눈을 뜨고 바른 자세로 있을때 보다 수업내용이 더욱 머릿속에 잘들어왔다. 
뿐만 아니라 내가 다녔던 송도중학교는 부산에서도 꼴통들만 모여있기로 유명했다. 전국에서 조직폭력배들을 가장 많이 배출한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실제로 재학생중에 칠성파 소속도 다수 있었고 소년원에 다녀와서 복학한 학생들도 있었다. 학교에서 칼을 보거나 그것에 다치는 친구들을 봐도 무감각해 질 정도로 서울에서 1학년을 다녔던 중학교와 비교하면 그야말로 엉망진창인 곳이었다 (서울 영서중학교도 썩 좋은 곳은 아닌 걸로 기억된다.). 공부는 커녕, 하루 하루 어떻게 싸움을 피할까 (싸움이라기 보단 주로 맞는 쪽)만 졸업할때까지 고민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다수의 꼴통학우들 덕에 면학분위기는 온데 간데 없고, 덕분에 내 석차가 그 정도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과 나만의 학습법이 효과가 있어서 중3이 되었을 땐, 꽤나 다양한 선택지가 있었다. 집안 형편이 어려운 걸 알았기에 3년 동안 무료로 다닐 수 있는 과학고가 너무나도 가고 싶었다. 내신 성적이 나쁘지 않고 시험은 어떻게든 바짝 하면 될 것 같아서 담임선생님께 이야기 드렸으나, 수학 성적이 기준이하라 원서도 낼 수 없다고 하셨다. 나만의 방법이 통하지않는 과목이 체육과 수학이었다. 누굴 탓하랴, 내가 공부를 안해서 그런걸...
당시엔 고등학교 입시에 시기적으로 순서가 있었다. 특목고, 일반고, 실업계/기타 순으로. 과학고를 일찍이 포기한 덕에 다른 특목고를 생각해 볼 여유가 있었다. 마침 동네에서 가까운 외국어 고등학교가 있어서 그곳으로 마음을 정했다. 아버지도 내가 특목고에 가는 것을 마음에 들어하셨다.
그렇게 일찌감치 외고 입학을 결정짓고 졸업을 기다리는 와중에 어느날 옆집 아저씨 (아버지의 오랜 친구이자, 공고 선생님)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보자고 하셨다. 지금의 내 상황에 외고를 가는 것은 무리라는 이야기였다. 신문배달을 해서라도 학비는 내겠다고 했지만 (당시 아버지 모르게 신문배달로 용돈을 벌고 있었다),  학비외에도 교재비, 과외 등등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이고, 내 실력으론 가봤자 하위권을 맴돌 것이라고 평소엔 너무나 온화한 아저씨가 나에게 정신차리라고 강하게 이야기하셨다.
크게 상처를 받고 아버지께 하소연 했지만, 아버지는 아저씨가 선생님이니 전문가의 말을 들으라고 하셨다. 나중에 알고보니 우리 형편이 어려워서 보낼 수 없다는 말을 내게 차마 직접은 하실 수 없어서 그렇게 돌려서 말한 것이다.
이미 일반고 지원시기마저 놓쳐버려서 내게 남은 선택지는 일반고 추가 모집이나 실업계였다. 일반고 역시 같은 이유로 제외했고, 옆집 아저씨의 권장으로 장학금을 받을 수 있을만한 국립 공업고등학교, 부산 전자공고 전자과에 지원해서 입학하기로 되었다.
그렇게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 등록금을 내야 할 시기가 왔다. 30만원 남짓이었던 걸로 기억된다. 고등학교 등교를 얼마 남기지 않고 납입 기한 만료가 다가왔을때, 아버지는 내게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신다. 수중에 돈이 전혀 없어 등록금을 낼 수가 없다고. 포항에서 약국을 하고 있는 고모에게 가보라고 하신다.
어릴땐 삼대독자라 고모들의 사랑을 독차지 했으나, 가세가 기운이후로 고모들과 교류도 없었고, 여러가지 일들로 아버지와 고모들은 껄끄러운 사이를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나 포항에 사는 막내 고모는 그 중에서도 엄한 표정과 말투 때문에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막내 고모에게 미리 자초지종을 이야기하지도 않고, 나와 동생에게 차비만 쥐어서 포항으로 보내신다. 고모 얼굴본 지 30분이나 되었을까 그저 오랜만에 놀러온 줄 알았던 조카가 등록금이 필요하다고 어렵게 돈 이야기를 꺼내니 아버지와의 돈 관계를 언급하며 매몰차게 혼내고선 차비만 쥐어준 채 돌려보낸다.
얼마 뒤, 중학교 졸업식날 아버지와 나, 동생이 함께 먹은 짜장면은 수년내에 가장 기억에 남는 행복한 한끼였고, 운좋게도 다른 경로로 등록금을 해결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하였으며, 후엔 성적 장학금, 근로장학생등으로 큰 어려움 없이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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