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의 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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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다음은 어디로 가세요?”  퇴사 후 오랜만에 만난 동료가 식사 자리에서 물었다. 나는 잠깐 망설이다 회사 이름을 말했다. 그는 나를 보다가 되물었다. "거기? 왜?"  그 질문에 제대로 답하려면 최소한 몇 년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수 년 전, 나름의 뜻을 품고 한국에 돌아왔다가 금세 다시 미국으로 돌아간 적이 있다. 그때 얻은 결론은 간단했다. 한국은 내가 일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그 결론은 꽤 오래갔다. Zoox 와 Embark Trucks, 자율주행회사에서 5년. 실리콘밸리에서 나는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을, 잘할 수 있는 방식으로 해나갔다. 다만 마음 한편에는 풀리지 않은 매듭이 남아 있었다. 그때의 결론이 한국에 대한 것인지, 그 시절의 나 자신에 대한 것인지, 솔직히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쿠팡에 합류한 건 그 매듭을 풀어보려는 시도였다.  결과부터 말하면, 매듭은 풀렸다.   한국에 본체가 있지만 시애틀, 베이징, 방갈로르에 엔지니어링 조직이 퍼져 있고, 업무의 많은 부분이 영어로 진행되는 곳. 피크 시즌 트래픽이 평시의 수십 배로 튀어도 견디는 시스템, 수백 개의 마이크로서비스가 맞물려 돌아가는 런타임, 한 줄의 쿼리 변경이 수천만 건의 일별 주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숫자로 설명해야 하는 설계 리뷰. Sr. Staff 으로서 아키텍처를 책임지고, 여러 팀의 설계에 개입하고, 리더십 역할까지 감당하면서, 나는 실리콘밸리에서 봤던 수준의 엔지니어링이, 한국을 거점으로 한 조직에서도 상당히 유사 작동하는 것을 직접 확인했다. 가능하다. 이미 하고 있다.  그 답을 확인한 순간부터, 묘하게도 다른 질문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거기? 왜?"라는 그날의 질문에, 나는 아마 이렇게 답했어야 했다.   내 커리어에서 가장 많은 권한을 가졌던 시기 중 하나였다고. 직함이 주는 권한, 조직이 위임한 의사결정의 범위, 내 판단을 신뢰하...

신토불이

오늘 아침은 여느때와 다름없이 가족이 둘러 앉아 캘리포니아의 햇살을 담뿍 담은 우리 고장의 쌀, 칼로스 (Calrose)로 지은 밥을 먹고, 식사 후에는 캘리포니아 오렌지를 디저트 삼았다.  그 다음은 출근 준비를 위해 캘리포니아의 의류 회사에서 나온 파타고니아(Patagonia)제 티셔츠와 바로 옆 동네인 샌프란시스코에 본사를 두고 있는 리바이스(Levi’s) 청바지를 입고, 마지막으로 우리 고장 자연명물인 요세미티의 하프돔을 로고로하는 우리 동네 알라미다(Alameda) 의 향토기업 노스페이스(The North Face)의 점퍼를 외투로 걸치고 차고로 나간다. 발 볼이 넓은 나에게도 편한 신발인 캘리포니아산 Hoka 운동화를 골랐다.  오늘 출근길은 집에서 약 20분 거리에 있는 공장에서 생산한 테슬라의 모델3를 타기로 했다. 자율주행 수준에 말이 많지만, 동네 장사에는 신경쓰는 지 완전자율주행(FSD)도 곧잘 되는 편이다. 차고를 나와 30분 남짓 걸려 이웃 마을인 포스터시티(Foster City)에 있는 향토기업인 나의 직장에 도착했다. 우리 고장의 대표기업, 애플(Apple)의 향토특산품인 맥북을 켜고, 동기업에서 생산한 에어팟을 착용하고, 역시 향토특산품, 아이폰에서 새로 출시된 애플뮤직 클래식으로 음악을 감상하며 업무를 시작한다. 우리 고장인 실리콘밸리는 항상 새로운 것을 추구하는 문화가 강한편이다. 이 곳 사람들이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고 적극적으로 시도 하였기에 오늘의 내가 상술한 것들을 누리게 한다. 다양한 문화와 인종이 공존하는 지역이기도 한데, 이러한 다양성이 새로움과 혁신에 큰 기여를 하고 있기에 한없이 부족한 나에게도 한 자리 내어주는 것일테다. 나는 이제 실리콘밸리에 정착하였다고 해도 될 것 같다. 

승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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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구니 물가가 심상치 않다. 아마도 코로나19가 유행하면서 시작된 물류대란이 장기화 되어서 일테다. 식음료, 생필품 가격이 오른건 물론이고 가끔은 대형마트에서 조차 늘 사던 물건을 찾지 못하기 일쑤다.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테지만 과거에 관련분야(Uber Freight)에 종사했던 경험으로 유추해볼때, 최근 경제 상황상 트럭 운수 인력 이탈로 인해 지상 물류가 대란을 겪고 있음이 아닌가 한다. 여전히 물가는 끝없이 오르고 있고 재고 상황은 크게 나아지지 않고 있음을 보아 인건비 증대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것 같다. 이대로 손 놓고 있기엔 나이지기만 기다리기엔 답답하다. 최근 자율주행분야에서 일했던 경험으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자율주행기술이 분명히 큰 도움이 될 것은 자명하지만, 파괴적 혁신으로 기존 시장을 오히려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을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여러 자율주행 물류 회사에 대해 조사하기도 하고 관련 업체들로 부터 제안도 받던 와중, Embark Trucks 라는 회사를 알게 되었다.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이 회사는 기존 물류 업계와 제휴하고 트럭 운전 기사를 보조하는 형태로 파괴적이지 않은 방식으로 시장을 개선하겠다고  하여 나의 눈길을 끌었다. 또한 작은 규모로 경쟁사들보다 기민하고 빠른 실행을 이루어 나가는 점도 마음에 들어서 길지 않은 고민 끝에 이들의 항해에 "승선"하기로 결정하였다. 합류를 결정하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지만, 현직장에 대한 예의로 원활하게 인수 인계를 마치느라 시기를 조율하기가 어려웠고, 얼마간의 휴식이 필요하다 생각해서 시작일을 미루던 중 회사측에서 입사 직후 장기간 휴가를 취해도 좋으니 당장 입사해 달라고 하여 그러기로 하였는데, 입사일이 바로 기업공개일이었다. 첫 일정은 뉴욕의 Nasdaq 빌딩에서의 만찬. 긴 휴식 이후 새로운 회사에서 좋은 동료들과 의미 있는 항해를 하고 있다.

엄마 놀이

“이제부터 내가 엄마고, 아빠가 아기 어때?”   하루에도 몇번씩, 한 열번 정도? 내 딸 일린이가 나에게 하는 제안이다. 사실 제안이라기 보다는 통보에 가깝다. 이 말을 한 이후부터는 내가 뭐라건, 어른스런 목소리로 나를 “아가야” 라고 부르기 시작하기 때문이다. 꽤나 엄마 흉내를 잘내어서 웃음을 참기가 힘들 정도이다.  엄마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린이가 하는 놀이는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늘 하던 소꿉놀이를 하는데 아가에게 줄 음식을 준비한다던가, 자동차 놀이 할때 나에겐 작은 자동차를 주며 아가는 작은 걸 가지고 놀테니 자신은 큰 걸 가지고 놀겠다거나, 항상 재워주던 인형 대신 나를 재워준다던가 하는 정도…  나도 기왕 아기가 되었으니 울며 아기 흉내를 내며 울면 일린이가 와서 달래주고, 아기 처럼 이것저것 모르겠다고 하면 자신이 아는대로 가르쳐주곤한다. 아기가 되었기 때문에 아기 놀이 텐트에 들어가야 되고, 잠은 아기침대에서 자야 된다. 엄마가 가자는 대로 따라다녀야 하는 것도 필수. 큰 덩치인 나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특히 일과시간에 일린이를 보는 것은 재택근무를 하며 잠깐 쉬러 나오는 것인데, 계속 움직여야 한다. 몸은 좀 힘들지만, 나는 이 놀이가 정말 좋다.  초등학교 2학년부터였던가, 자주 집을 나가셔서 돌아오지 않던 나의 엄마는 중학교 올라가자마자 영원히 나가셔서 십년 후 돌아가셨다는 소식을들을 때까지 목소리 한 번 들을 수 없었다. 이러한 사연으로 어릴 적부터 엄마라는 말만 들으면 눈물부터 차올랐기 때문에, 성인이 되어서까지도 입밖으로 엄마라는 단어를 거의 내지 않고 살아왔다.  일린이 덕에 하루에도 몇 번씩 마음 껏 엄마를 불러보고 아이처럼 지내니 마음 한 켠에 있던 짐의 무게가 점점 가벼워지는 것만 같다.

자율

 나름의 뜻을 품고 전망좋은 직장을 박차고 고국으로 떠났으나, 내 능력을 과대평가한 것인지, 다른 원인이 있는지, 여러 사정상 정해진 역할 안에서 나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는 것을 일찌기 깨닫고 서로간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지 않도록 신속히 결정을 내리고 얼마전에 지내던 곳으로 돌아왔다. 이전 회사로 돌아가는 것을 가장 먼저 떠올리고 원래 속했던 팀으로 재입사 절차를 밟기로 했다. 돌아간 사무실은 물리적인 위치를 옮겨서인 탓도 있고, 팀원 물갈이, 기업공개 등으로 더 이상 그리워 했던 곳이 아님을 깨닫고 일단 보류하고 잠깐 쉬면서 남가주를 여행하기로 했다. 달콤한 휴식도 잠시.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 지 조금은 막막해졌다. 배부른 소리일 수도 있겠지만, 선택의 여유가 생겨서이다. 예전부터 동경하던 알만한 다국적기업에 면접을 보고 좋은 결과를 얻었는데, 리더십항목에서 큰 점수를 얻어서 매니저 역할로 다시 진행해보는 것은 어떠냐는 피드백도 함께 받았다. 너무 쉽게 풀려서일까? 막상 일을 시작하려니 망설여졌다.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맞는지. 고성과를 기대하는 큰회사라는 중압감은 견딜 수 있을지. 중요 의사결정과정에 내 의지는 얼마나 반영될 수 있을지. 잠깐의 고민뒤 면접 본 포지션은 보류하기로... 매니저가 되어야 하나? 전부터 나이나 경력을 고려했을때 매니저가 되면 좋을 것이라는 조언을 들어왔다. 내가 역량이 모자란 것도 하나의 구실이지만, 동료들이 일을 잘할 수 있게 하는 것보단 내가 직접 나서서 해결하는 것을 선호하기 때문에, 가능하다면 실무에 가까운쪽에 남고 싶다. “내가 원하는 일은 무엇일까” 안정? 균형? 도전? 끊임 없는 질문을 자신에게 던져봤지만, 나도 나를 모르겠더라. 일찌감치 사업 할 그릇은 되지 않는 다고 판단해서, 끌리는 많은 곳에 입사지원을 하고 면접을 보며 알아가기로 했다. 클라우드, 사회관계망 회사, 음식 기술 회사들, B2B 분석, HR 기술, 각종 O2O 회사 등등 여러분야에 대면 면접을 보았고 몇몇으로부터는 ...

귀향

Uber 의  문화적 규율(Cultural Norm)  중에 “범지구적으로 만들고, 지역적으로 살아간다 (We build globally, we live locally).” 라는 항목이 있다. 봉사하고 있는 지역에 깊숙이 연결되기 때문에 전세계를 대상으로 운영하는 규모와 힘이 나온다는 것. 나는 지역적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내가 만드는 모든 것들을 범지구적으로 만드는 것은 확실하지만, 입사한 이래 여러 팀을 거치며 내 영향이 더해갈 수록 내가 속한 지역사회는 어디인가라는 지속적인 질문을 이어왔다. 8년전부터 살고 일하고 누리고 있는 이 곳 샌프란시스코만 지역인가. 아니면 내가 태어나고 성장하고 일했던 한국? 미국에 살고 있지만 항상 한국 뉴스를 보고, 한국의 문화를 소비하며, 한국인 친구들을 주로 만나고, 한국 사회를 이야기하며 살고 있다. 요즘 가장 화두가 되는 건 남북 화합의 분위기이다. 큰 진전을 이루고 있는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우리 회사 소개에 이런 문구가 있다. We ignite opportunity by setting the world in motion   (세상을 움직여 더 많은 기회를 창출한다). 남과 북이 교류한다는 것은 더 많은 움직임. 즉 교통수단이 필요하다는 것이고, 승차 공유가 그 중 하나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경제력이 상대적으로 낮은 북한에 즉각적으로 소득원을 제공하여 남북의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 한국의 높아진 실업률에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음식배달, 화물운송공유,  일용직 알선 등 이미 우리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들이 많은 이들에게 양질의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으리라 믿는다. 남북정상이 두 손을 맞잡은 이래, 회사가 한국내 사업을 본격화하여 이러한 일에 적극적으로 나설 수 있는 기반을 갖추기를 학수고대하며, 한국인으로서 참여할 수 있을까 기대중이었다. 그런데 객관적으로 우리 회사가 이를 잘 수행할 수 있을까? Uber의 한국내 사업 진전에 촉각을 ...

살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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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살까지만 살고 싶어요" 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를 보진 않았지만, 어린 날의 내 기억속에 언제나 새겨져있던 말. 등하굣길에 포스터를 본 이래 스무살에 죽고자 생각하고 암울한 현실을 버티며 살아왔다. 지금에야 결과를 보고선 나를 강한 사람이라 하지만, 바람앞의 등불처럼 세상 누구보다 나약했다. 입학때부터 매학기 초등학교 성적표엔 줄곧 눈물이 많은 아이라는 선생님의 평이 따라왔다. 너무 슬픈 일이 많았다. 엄마 아빠는 하루가 멀다하고 싸우고, 장난끼 많던 나는 끊임없이 사고를 치는 바람에 부모님께 매일 혼났다. 갖고 싶던 장난감도 갖지 못하고, 보고 싶은 만화영화도 못보고, 그렇게 억울한데 학교에 와서 선생님께 혼나기까지 하면 눈물이 터지기 일쑤. 발가벗겨져 밖에서 벌서다 학교 친구들이랑 마주치거나, 다투고 난 뒤 몇날 며칠을 집에 안들어오시는 엄마가 그리워질때는 어린 나이에도 삶에 대한 의지가 꺾이기 다반사였다. 아버지 관점에선 아들이 사고뭉치라 무시무시하게 두꺼운 각목인 “교육봉”에 온몸에 멍이 들도록 맞거나, 정말 화가 나시면 당시 여느 이웃집에서 그렇듯 나에게 손찌검을 하시기도 했다. 익숙해질만도 하건만 세상에서 유일하게 의지하던 존재였기때문에 아버지께 맞을때마다 너무도 서러웠다. 밖에서도 하루가 멀다 하고 맞고 다녔다. 특히 부산에 이사가선 서울말투를 쓴다는 것 때문에 얼마나 시달렸는지 모르겠다. 학교에서건 길거리에서건 서울말투 재수 없다고 시비 걸었지만 부산사투리는 단기간에 익힐 수 없었다. 맨손으로 맞으면 좀 나았다. 여럿에게 둘러싸여 맞거나, 몽둥이, 쇠파이프, 칼로 맞으면 이대로 죽겠구나 싶었다. 이렇게 맞다가 학교 옥상에서 뛰어내려 자살한 학생이 있어 옥상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나도 그 친구를 따라갈까란 생각을 여러번 하다가, 곧 맞아서 죽을테니 어차피 그게 그거겠구나 하고 버티다 보니 졸업을 하게 되었다. 다행히 진학한 학교는 버스 종점에서 종점 구간이라 중학교 때 마주친 이들을 다시 볼 일이 드물었다....